도신리
도신리
본래 철원도호부의 외서면 지역인데, 1895년(고종 32) 외서면이 신서면으로 개칭되면서 신서면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도랑리*신순리*빈연리 등 3개 리를 병합하여 도신리라 하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민간인 입주가 허용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동인접지구의행정구역에관한임시조치법」에 의하여 철원군에서 연천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5개 행정리, 47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명유래
- 노루맥이[獐項洞] : 서재골 서쪽에 있던 마을. 지형이 노루목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원래는 '늘어진'*'넓은'의 뜻인 '너르'가 '노루'로 음이 변하여, '넓게 늘어진 목'이라는 의미이다.
- 능안 : 원앞산 앞에 있던 마을. 이곳에 위치한 김응구의 묘를 능에 비유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우봉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 도랑리(道浪里) : 국사봉 북쪽에 있던 마을. 답곡리의 공장골과 고래골에서 내려오는 두 도량(내)의 안에 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으로, 예전에 활을 쏘던 정자가 있었다 하여 '사정동(射亭洞)'으로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 방아다리(杵橋洞) : 태봉 북쪽에 있는 마을. 예전에 디딜방앗간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보맥이 : 원앞산 서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차탄천을 가로 막은 보(洑)가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이후 옛 마을터에는 군부대가 들어서 있고 지금은 새로 설치된 큰 보가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 삼둔이[三屯洞] : 벙바위 북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예전부터 가구 수가 줄지도 늘지도 않고 세 가구만 살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 안골[內洞] : 서재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도로에서 들어가 골짜기 안에 마을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작은안골과 안골로 나뉘며 한국전쟁 전에는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15호 살았던 곳이다.
- 장거리(場巨里) : 태봉 아래에 있던 마을. 엣날에 장이 섰던 곳이라 한다.
- 점말[店村] : 광대울 입구, 3번 국도 옆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 독개미골에 경영되었던 백자도요지 앞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솥을 주조했던 솥점이 있었다 한다.
- 창말[倉村] : 태봉 동쪽에 있는 마을. 철원도호부에서 관할했던 5개의 곡물 창고 가운데 하나인 서창이 있던 곳으로 『철원읍지』에는 이 창고의 위치와 규모에 대해 “서창은 철원 관아에서 서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는데 규모는 16칸이다(西倉在府西三十里十六間)”라고 적고 있다.
지역명칭 설명
- 가는골 : 방아다리 서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 광대울[光大谷] : 두리봉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 대광산(大光山) : 백일봉 남쪽, 도신리·대광리·내산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541.3m.
- 독개미골[獨琴谷] : 원앞산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예전에 우봉 김씨 문중의 어떤 선비가 이 골짜기 입구 모퉁이에 초당을 짓고, 거문고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원래의 뜻은 이 골짜기 안에 있는 몇 기의 백자도요지로 인하여 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다 하여 '독 + 가마 + 골'로 불리던 것이 '독개미'로 음이 변하여 굳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철원읍지』에는 이 곳을 '독검리(篤儉里)'로 기재하고 있다.
- 두리봉 : 창말 남쪽, 광대울 입구에 있는 봉우리. 정상부가 둥글게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두투맥이 : 보맥이에서 연천읍 와초리로 넘어다니던 고개. 우봉 김씨 족보에는 '이태항(二太項)'으로 기재되어 있다. 원래는 이 곳의 지형이 불룩하게 돋아 있는 산등성이 사이로 넘어다니는 목이 되어, '돋은 + 목'으로 불리워지던 것이 '두투(도투)맥이'로 발음이 변한 것이다.
- 뒷골 : 보맥이 마을 뒤편에 있는 골짜기.
- 말구산 : 독개미골 입구에 있는 봉우리.
- 목목이고개[墨墨峴] : 광대울에서 내산리 목목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큰고개' 또는 '아리랑고개'라고도 한다.
- 목탁봉 : 옛고개 옆에 있는 목탁처럼 둥근 조그만 봉우리.
- 미골 : 태봉 서쪽 국사봉에 딸려 있는 골짜기. 단순히 산골짜기의 뜻인 '뫼골'이 '미골'로 어휘가 변하여 불리워지는듯 하다.
- 백일봉 : 대광리역 동쪽, 도신리와 대광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 벙바위 : 방아다리 북쪽, 산부리 끝에 있는 바위. 옛날에 부엉이집이 있었다고 한다.
- 불견산(佛見山) : 불견이고개 북쪽, 내산리와 경계에 있는 산. 높이 535m.
- 불견이고개[佛見嶺, 佛峴] : 사기막골과 내산리 법화골 사이에 있는 큰 고개. 『불교영험설화집』에 실려 있는 「심원사대종불사기(深原寺大鍾佛事記)」에 이 고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고려 목종 때 일이다. 보개산 심원사에서 대종불사를 하는 데 참여한 대광리의 앉은뱅이 박춘식과 장님 이덕기가 대종준공식에 가는 도중, 이 고개에 이르러서 부처님을 뵙고서 눈이 뜨이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그 큰 재를 '부처님을 뵌 고개'라 하여 '불견령(佛見嶺)'이라 하였고, 부처님의 광명이 크게 내려 비친 이덕기와 박춘식이 사는 마을을 '대광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불견산*천광골*대광산
- 샛대광*광대울이라는 이 곳과 관련된 지명이 지금도 쓰이고 있다.
- 사기막골[沙器幕谷] : 도신리 가장 남쪽, 연천읍 옥산리와 경계에 있는 큰 골짜기. 조선 후기에는 백자도요지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새골 : 태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보맥이와 방아다리 마을의 사이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서재골[書齋谷] : 가는골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우암 송시열이 한때 머무르며 강론을 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손맞이비냥산[賓延] : 원앞산 남쪽, 연천읍 와초리와 경계에 있는 산. 조선 중기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응구(金應九, 1555∼1625)가 세상을 떠나자 원앞산에 유택을 모시고 그의 아들 삼형제가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런데 묘 옆으로 나 있는 큰 길로 사람과 우마의 통행이 빈번하여 늘 근심하다가, 짚신과 행전을 만들어 행인들에게 건네주면서 보맥이 쪽으로 돌아서 가도록 인도했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삼형제의 효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산을 '손맞이비냥산'이라 이름지었고, 예전에 함경도로 가는 대로였던 이 고개가 삼형제로 인하여 사람이 통행하지 않는 고개가 되어 '옛고개'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 어두니골 : 목목이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나무가 무성하여 숲이 우거진 음지가 되어 골짜기 안이 항상 어둡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여내골 : 사기막골에 있는 골짜기. '얕다'의 고어 '여내'에서 뜻을 따와 지어진 이름이다.
- 옛고개[古峴] : 원앞산 동쪽에 있는 고개. 현재 3번 국도가 지나간다.
- 원앞산 : 태봉 남쪽에 있는 산. 높이 125.1m. 능안 마을에 국가의 국영 여관인 원이 있었는데 원의 앞에 있어서 원앞산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 작은골 : 큰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큰골과 상대되는 지명이다.
- 작은독개미골 : 독개미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창뒤봉[倉後峰] : 작은골 남쪽에 있는 뾰족한 봉우리. 높이 376m. 옛 철원도호부에서 관할했던 곡물 창고인 서창(西倉) 뒤에 있는 봉우리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큰골 : 구시울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 태봉(胎峰) : 원앞산 북쪽, 경원선 철로변에 있는 둥근 산. 예전에 궁실에서 왕족의 태를 봉했다 하나 현재까지 유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